명문대생 100여명, 저소득층 자녀 위해 2년째 공부방 꾸려
"배운만큼 나누자" 뭉쳐 직접 눈높이 교재 만들어 입소문 타고 수강생 급증
오래된 다세대주택과 상가건물이 즐비한 서민 동네에 명문대 대학생 100여명이 돌아가면서 공짜로 수학 과외를 해주는 공부방이 있다. 서울대·연세대 등 국내 명문대와 아이비리그(
미국 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 재학생들이 가르친다. 이 공부방에 다니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형편이 어려운 집 자녀일 것. 둘째, 중학교 2학년일 것.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하 배나사)은 저소득층 중2 자녀만 꼭 집어 가르치는 대학생 봉사단체다. 22일 오후 7시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의 허름한 상가건물. 미니교실(19㎡·6평) 3개마다 중2 학생들이 각각 10~15명씩 모여 앉아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김주리(가명·14)양이 문제지를 읽다 킥킥 웃었다.
"주리와 주리 친구가 3개 고등학교 중 한 곳에 배정받는다. 두 사람 모두 신광여고에 배정받을 확률을 구하라."
김양은 '9분의 1'이라고 답을 적고, 자원봉사 교사 정경훈(21·
연세대 생명공학과)씨에게 소리쳤다. "요 베이비(Yo baby), 문제 풀었어요!"
정씨는 "지난 1학기 중간고사 때 수학에서 40점을 맞은 주리가 기말고사 때는 70점을 맞았다"고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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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과학고 동문들이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의 한 임대 교실에서‘중2’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자녀 중 수학 성적이 낮은 중2 학생들만 대상으로 맞춤형 학습지도를 한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배나사는 2007년 5월 서울과학고 동창생 10여 명이 모여서 만들었다. 이준석(24·하버드대 4년)씨가 동문회 홈페이지에 "소외된 계층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글을 띄운 게 계기였다.
동창생 10여 명이 힘을 보태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과외를 해서 가장 성적을 올리기 쉬운 시기는 중학생 때'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1은 뺐다. 다음해 수강생을 뽑는 겨울방학 때 아직 초등학생이라 중학교 교사의 추천을 받기가 어려웠다. 중3도 뺐다. 고등학교 가기 전에 성적을 올리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배나사 회원 이대훈(19·경찰대 법학과 2년)씨는 "나도 중2 때 PC방을 다니며 방황하다 성적이 떨어져 중3 때 고생한 기억이 있다"며 "중2 때 성적에 따라 이후의 성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 다음은 교실과 학생을 확보해야 했다. 2007년 7월, 배나사 회원들이 용산구청에 찾아가 "수학은 자신 있다. 도와 달라"고 했다. 용산구청 가정복지과 홍성숙 계장은 "명문대 학생들이 돈도 안 받고 남을 가르치는 일을 과연 얼마나 계속할까 싶어 처음엔 믿음이 안 갔다"고 했다.
대표 이씨는 "어려울수록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배나사 회원들은 5개월에 걸쳐 수학교재 샘플을 만든 다음 용산구청에 들고 갔다. 중2 교과서와 문제집 10종을 참고해서 만든 정밀한 교재였다. 구청이 이들의 정성에 놀라 흔쾌히 협조해주기로 했다. 관내 중학교 5곳으로부터 수강생 추천서를 받아 배나사 측에 전해주고, 공간도 알아봐 줬다. 배나사 회원들은 집안이 어렵고 성적이 낮은 학생 30여 명을 뽑았다.
배나사 회원들은 2008년 1월 서울 보광동 오산중학교 교실 2개를 빌려 수업을 시작했다. 1년 뒤, 용산구청이 성과를 인정하고 6000만원을 대주기로 했다. 배나사는 올 1월 지금 건물로 옮겼다. 구청 지원금으로 1년 임대료를 내고 미니교실 3칸을 꾸몄다.
서울대 등 5개 대학 게시판에 회원모집 포스터를 붙여 홍보한 끝에 회원이 100여명으로 불었다. 강사가 늘수록 수업이 점점 충실해졌다. 모든 수업에 전반적인 이론을 가르치는 정교사 1명, 1대1로 문제 풀이를 해주는 부교사 4명 등 5인1조 강사진이 들어가 학생 10~15명을 가르친다.
이들은 수학문제 지문에 아이들 실명을 넣거나 인기 그룹 '소녀시대' 등을 언급해 흥미를 돋운다. 아이가 시무룩하면 보호자에게 전화해 상의한다. 작년 여름, 보육시설에 사는 한 아이가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일어서서 수업을 들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같은 시설에 있는 나이 많은 아이에게 맞아 온몸에 푸르죽죽하게 멍이 든 상태였다. 담당교사 국수근(19·한국과학기술연구원)씨가 시설에 전화를 걸어 이 학생이 더 이상 맞지 않도록 조치했다.
올해 1학기에 배나사에 다닌 학생은 30여 명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기 학교에서 치른 기말고사에서 중간고사 때보다 수학 점수가 평균 13점 올랐다. '싱글 맘'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조모(14)군은 "대학생 형들이 재미있게 가르쳐줘서 날마다 '소풍' 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수학 점수가 40점이었는데 70점을 넘었어요. 저는 꿈이 없었는데, 이젠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용산구청 자원봉사센터 서미정 주임은 "배나사가 입소문 나면서 학부모들 전화가 많이 온다"고 했다. "우리 아들은 고2지만 수준은 딱 중2니까 받아줄 수 없겠냐?"는 문의도 있다.
홍성준(22·컬럼비아대 4년)씨는 "학부모들이 생계에 바빠 상담 전화를 걸어도 '우리 아이가 거기 다녀요?' 하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며 "어려운 환경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부유한 환경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란 내가 부끄러워진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배나사 회원들은 학생 60명을 더 받았다. 내년부터 중3도 받을 계획이다. 대표 이씨는 "아이들이 벌써부터 '중3이 되면 못 다니나요?' 하고 바짓가랑이를 잡는다"며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동네에 공부방을 더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궁리 중"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090725